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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ajor_전공 관련 정리/New Testament_신약 관련

[Theology] 신약성서 신학(New Testament Theology) 5

by loveelovee 2022. 11. 29.

  이를테면, 주후 20세기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신학을 구성하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신학은 그들의 신학이 조직적이어야 하고 종교개혁의 신학에 굳건하게 토대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상당히 동질적이고 비교적 소수였던 특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이 지는 특징적이고 성숙한 이해에 관한 서술이 될 것이다. 동일한 시기에 있어서 영국 국교회의 신학에 관한 서술은 일부 집단들이 다른 집단들과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상반되는 사상을 지니고 있는 등 훨씬 더 광범위한 사상과 접근방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더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지만, 장로교 신학 또는 로마 가톨릭 신학과 대비되는 영국 국교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인 신앙에 깊게 뿌리박고 있었던 유대인들로부터 이전에 여러 우상들을 섬겼던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가족 속에서의 기독교의 탄생과 신속한 성장의 시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몇몇 접근방식들이 존재해왔는데, 그것들 중 일부는 다른 것들보다 더 생존력이 강하였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을 토대로 살펴볼 때, 우리가 신약성서의 모든 책들을 무차별적으로 우리의 덕을 세우는 데에 사용될 돌들을 캐내기 위한 채석장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진 것 같다. 신약성서의 모든 책들로부터 신학적인 진술들을 뽑아내어서 그 인용문들을 조화롭게 묶어놓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방식은 그 인용문들을 문맥으로부터 벗어나서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고, 그 본문들이 정호가히 무엇을 단언하거나 함축하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그 본문들이 지닌 뉘앙스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결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접근방식은 인용문들이 모두 반드시 동일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들을 모아놓은 것이 과연 신학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신학이 되려면, 어떤 종류의 배열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본문들을 배열할지를 결정하는 것인가? 돌무더기를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만들어 내려면 어떤 종류의 설계도가 꼭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접근방식은 거기에서 따라 나오는 두 번째 접근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 두번 째 접근방식은 신약성서의 어느 저자의 생각 속에 그러한 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어떠한 확고한 증거도 없이 조직신학 교과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기존의 설계도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틀이 신약성서의 틀이라고 굳게 확신한다는 것을 우리는 말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두 접근방식의 결합은 신약성서의 책들이 모두 반드시 동일한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그 책들을 무차별하게 사용하는 것과 거기에 적용된 틀이 마치 신약성서의 틀이라도 되는 듯이 사용하는 것, 이러한 두 가지 방법론상의 오류들을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본문에 대한 왜곡과 시대착오적인 서술이다. 신약 신학을 진지하게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런 노선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주 후 20세기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신학을 구성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신학은 그들의 신학이 조직적이어야 하고 종교개혁의 신학에 굳건하게 토대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상당히 동질적이고 비교적 소수였던 특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이 지는 특징적이고 성숙한 이해에 관한 서술이 될 것이다. 동일한 시기에 있어서 영국 국교회의 신학에 관한 서술은 일부 집단들이 다른 집단들과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상반되는 사상을 지니고 있는 등 훨씬 더 광범위한 사상과 접근방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더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지만, 장로교 신학 또는 로마 가톨릭 신학과 대비되는 영국 국교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인 신앙에 깊게 뿌리박고 있었던 유대인들로부터 이전에 여러 우상을 섬겼던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가족 속에서의 기독교의 탄생과 신속한 성장의 시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몇몇 접근방식들이 존재해왔는데, 그것 중 일부는 다른 것들보다 더 생존력이 강하였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을 토대로 살펴볼 때, 우리가 신약성서의 모든 책을 무차별적으로 우리의 덕을 세우는 데에 사용될 돌들을 캐내기 위한 채석장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진 것 같다. 신약성서의 모든 책으로부터 신학적인 진술들을 뽑아내어서 그 인용문들을 조화롭게 묶어놓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방식은 그 인용문들을 문맥으로부터 벗어나서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고, 그 본문들이 정확히 무엇을 단언하거나 함축하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그 본문들이 지닌 뉘앙스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모자라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접근방식은 인용문들이 모두 반드시 동일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들을 모아놓은 것이 과연 신학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신학이 되려면, 어떤 종류의 배열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본문들을 배열할지를 결정하는 것인가? 돌무더기를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만들어 내려면 어떤 종류의 설계도가 꼭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접근방식은 거기에서 따라 나오는 두 번째 접근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 두 번째 접근방식은 신약성서의 어느 저자의 생각 속에 그러한 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어떠한 확고한 증거도 없이 조직신학 교과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기존의 설계도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틀이 신약성서의 틀이라고 굳게 확신한다는 것을 우리는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두 접근방식의 결합은 신약성서의 책들이 모두 반드시 동일한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그 책들을 무차별하게 사용하는 것과 거기에 적용된 틀이 마치 신약성서의 틀이라도 되는 듯이 사용하는 것, 이러한 두 가지 방법론상의 오류들을 결합하고 있다. 그 결과는 본문에 대한 왜곡과 시대착오적인 서술이다. 신약 신학을 진지하게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런 노선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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